삼국사기 '문무왕 편'을 제발 읽어보라고 내가 주변에 권하는 이유

[사진=의협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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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한국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에 초청돼 참석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유럽과 미국이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에도 '각'을 세우는 참에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불만을 토하는 이도 있다. 

'나토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부른 것 같지도 않다.'
'중국과 거리를 두게 되는 일이다.'

물론 환영하는 이도 있다. 

미국, 그리고 '중-러'에 대한 호불호 혹은 인식 차이 때문에 이런 단층이 생기는 듯하다. 대개 우파는 찬성, 좌파는 반대 혹은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특히 우리 미래를 위해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정파적으로 견해가 무척 다르기에 이런 차이가 더욱 커지는 것 같다. 하긴, 중국은 '대한민국 헌법상'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였으니까.

이 장면에서, 좌우파 여부를 떠나 '한반도 정치 세력'에 대한 중국의 대응, 아니 더 정확히는 한반도를 장악한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세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미래 대응을 위해, 과거를 공부해보자는 뜻이다.

한반도 최초의 정치 세력은 조선(朝鮮. 우리가 '고조선'으로 잘못 부르는!)이었다. 조선의 건국을 삼국유사처럼 서기전 2333년으로 보실 분도 있겠지만, 고고학적 증거 등으로 살피면 그보다는 훨씬 늦은 것 같다. 건국이 언제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의 몰락이 서기전 108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후 중국은 조선 땅에 4개 군(한사군)을 설치해 '직접 지배를 하려고' 했다. 

조선이 몰락한 서기전 108년은 어떤 '시대적 배경'이었을까? 

중국은 '자신을 침략한 나라나 민족에 대해 반드시 복수한다'는 원칙이 있는 듯하다. 그 시작은 흉노족이었다.

진나라의 혼란을 딛고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중국의 북쪽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던 흉노를 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작전을 단행한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유방)가 직접 출정했지만 대패한 뒤 치욕적인 화친조약을 맺는다.(서기전 200년) '평성의 치욕'(平城之恥)이다.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 공주까지 흉노 왕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이를 잊지 않던 유방의 증손자 한 무제는 흉노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고, 서기전 129년 흉노의 경제적 본거지를 장악한다. 이후 흉노는 쇠퇴한다. 

이후 무제는 중국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주변 세력을 제거하면서 요즘 지리개념으로 치면 동북아에서 '중국 제일 중심의 외교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베트남(당시 이름은 남월 南越)에 이어(서기전 111년), 조선이 멸망(서기전 108년)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베트남이나 조선이나, 내분으로 망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압도적 군사력 앞에 망한 것이지! 

두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한나라에 '무조건적 충성'을 외쳤어야 했을 것이다. 두 나라는 그러지 않은 것이고. 어찌 됐든, 한나라의 조선 침략은 중국 통일 왕조의 첫 번째 한반도 침공으로 기록된다. 

우리가 그리도 자랑하는 '만주의 지배자' 고구려의 등장은 한나라의 몰락 이후 중국의 분열과 궤(軌)를 함께 한다. 서기 전후한 시점에 한나라 내부 반란으로 '신'(新)이 성립하는 등 중국은 분열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삼국으로 분열(서기 3세기), 오호십육국(한족 및 다섯 오랑캐가 세운 16개국이라는 의미. 서기 4~5세기 전반)을 거친다. 

물리법칙은 외교에도 적용된다.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이 강해질 수밖에… 고구려가 건국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는다.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서기 244년), 전연 왕 모용황의 침입(서기 339~342년)이 그것이다. 두 침입 모두 고구려의 수도가 점령당한다. 

냉정히 볼 때, 위나라든 전연이든 중국 대륙의 패자(霸者)는 아니었다. 중국 대륙 통일을 위해, 자신들의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대륙의 패권 다툼에 참여했던 '중국 내 분열 국가'가 고구려를 침입한 것이다.  

그러나 서기 5세기 중반, 중국이 남북조라는 두 개 나라로 '상대적 통일'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에 대한 침입은 더는 생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의 팽창도 최소한 만주지역 너머에서는 멈추게 된다. 

왜? 고구려는 중국 북쪽을 통일한 왕조에 조공을 바치며 '항복'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최대 팽창 왕으로 우리가 꼽는 장수왕(재위 서기 412~491년)조차도 중국 북조에 여러 차례 조공을 바친 것으로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북조로서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도 바쁜데, 조공을 꼬박꼬박 바치는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신경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상황은 중국이 다시 통일되면서 급변한다. 서기 6세기 말,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그것이다. 한나라의 분열 이후 근(近) 370년 만에 동북아 패권 국가를 다시금 자부하게 된 수나라는 고구려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누차 날렸다.

'고구려 왕이 수나라 조정에 들어와서 신하임을 명확히 밝히라.' 

소위 '입조칭신론'(入朝稱臣論)이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위나라나 진나라, 혹은 남북조 등 이전의 분열된 중국 왕조와 우리는 레벨이 다르다. 우리는 진과 한을 이은 중국 통일 제국이다'며 수나라에 의해 복원된 동북아 국제 질서를 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끝내 왕이 수나라 조정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작된 게 고구려와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전쟁이었다. 

우리는 을지문덕의 활약 등으로 고구려가 수나라 침입을 모두 물리쳤다고만 알고 있다. 제발 삼국사기를 단 한 번만이라도 꼼꼼히 읽어주시라. 그 네 차례의 침입 동안, 고구려는 매번 항복 문서를 수나라에 보낸다. 을지문덕의 대승 때도(이는 수나라의 2차 침입으로, 서기 612년) 고구려는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직접 공격하지 못한 채 80~90리 거리를 두고 쫓았다'고만 기록(삼국사기)돼 있다. 패주하는 적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안 됨을 고구려는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몰락한다. 아까도 말했듯, 중국은 '자신에게 수치를 준 나라에 대한 복수' 혹은 '중국 제일주의에 반기를 드는 나라에 대한 공격 본능'을 DNA처럼 가진 국가이다. 이제, 그 역할을 당이 맡게 된다. 당의 고구려 침공은 그것 외에는 해석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몰락한 것이고.

고구려와 백제의 몰락을 내부의 분열로 보는 시각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단선적이라고 필자는 본다. 중국을 통일한 당의 지속적 침입을 고구려나 백제가 과연 막을 수 있었을까? 당나라의 침입 때면 '적이 군량미로 쓸까 봐' 경작지에 불마저 지른 뒤(이를 청야(淸野)작전이라고 한다) 산성에서 농성하는 고구려가? 

요즘 예를 들자면, 미국이나 나토의 지원 없이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가 과연 러시아의 침입을 홀로 막을 수 있을까? 중국을 통일한 국가를 막을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서기 7세기 동북아에 어디 있었나?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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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뒤 신라에도 눈을 돌린다. 우리는 신라가 눈부신 항전으로 대동강~원산만 이남을 지켰다고 알고 있다. 다시금 부탁하는데, 제발 '역사 인식의 천동설'에서 헤어나시라. 서기 676년 당나라가 왜 갑자기 신라에 대한 침공을 멈췄을까? 

서기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라마저 복속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벌어진 게 나당전쟁이다. 이때, 신라 문무왕은 여러 차례 당나라에 조공을 겸한 외교 문서를 보낸다. 

'우리는 절대로 당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당 태종께서 애초 약속한 대로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 이것을 안 지키니, 우리가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땅을 넘볼 생각이 애초 없었다. 게다가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 중에도 당에 조공하는 등, '당을 통한 동북아 질서 유지'에 따르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당은 신라를 믿지 않고 고구려 몰락 뒤에 신라와 전쟁을 한 것이다.  

이때 '토번'(오늘날 티벳)이라는 최대 변수가 등장한다. 서기 7세기 중엽, 요즘의 티벳 지역에서 힘을 떨치기 시작한 토번은 당의 입장에서는 흉노에 대한 치욕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당은 서기 670년, 신라와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토번에 대한 침공을 단행한다. 결과는 당의 참패였다.

자, 당으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전선을 동부(대 신라 전쟁)와 서부(대 토번 전쟁)로 나눠야 할까, 아니면 당이 요구하는 국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신라와의 전쟁을 그만두고 서부로 전장을 집중시켜야 할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그래서 서기 676년 신라와의 전쟁은 끝난 것이다. 신라가 아니라, 당에 의해서! 신라는 애초, 당과는 싸울 생각도 없었고, 대동강 너머로 진격할 의사도 없었으니까.

숱한 이들이 문무왕을 '외세를 끌어들인 매판왕'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분에게 냉정히 여쭈어본다. 신라를 군사적으로 도울 국가가 서기 7세기 후반기에 있었나? 군사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왜(일본)는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신라를 도울 군사력은 고작해야 고구려나 백제의 '패잔병'일 터인데, 그것으로 당과의 싸움이 될까? 

제발, 삼국사기 문무왕 편을 찬찬히 단 한 번만이라도 읽어주셨으면 한다. 신라를 지키기 위한 문무왕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그 어떤 세력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천동설' 만큼이나 황당하다.

자, 이제 냉정히 살피자. 문무왕 이후 중국 통일 왕조의 한반도 침입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왜? 후대의 한반도 통일 왕조는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중국 통일 제국과 맞상대할 수 없음을 말이다. 조선과 고구려 백제가 중국 통일 왕조와 맞서다가 몰락했다. 하여, 후대의 한반도 지배자는 중국 통일 왕조에는 '납작 엎드렸다.'

물론 몽골과 거란(요) 그리고 후금(청나라)이 한반도를 침입했지만, 그들은 한족이 아니거나 중국 통일 왕조가 아니었다. 중국 대륙의 통일을 위해, 자신들의 ‘배후지’를 내 편으로 만들거나 안정화시키려고 침입한 것일 뿐!

중국 통일 왕조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온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요청이었거나, 조선의 종주권을 놓고 청과 일본이 싸울 때(청일전쟁), 그리고 6.25 때 북한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20세기 전까지 중국에 강력한 통일 왕조가 성립했을 때 한반도의 운명은 명확했다. 중국의 구심력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한반도는 전쟁을 겪기도 했고, 무난히 넘어가기도 했다. 슬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21세기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20세기 최후반기부터 사회주의의 질곡에서 서서히 벗어난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달 탐사선을 띄운 나라이다. 군사비 15억 원을 마련하려면 대한민국은 1인당 30원을 내야 하지만, 중국은 1인당 1원만 내면 그만이다. 한류가 중국 젊은 세대를 매혹시켰고, 바둑이나 축구에서 '공한증'이 있다고, 우리가 중국을 낮잡아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솔직히 필자는 두렵다. 

고백하면, 필자는 잘 모른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분명한 것은 힘이라는 면에서는 중국이 미국에 아직은 비교할 수 없이 약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국과 '헌법상' 영토를 맞닿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과 '기류'를 맞추어 나아가되, 중국과 굳이 담을 쌓지는 않는 방식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필자의 돌머리로는 해법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 

현명하신 분들이 이런 점에서 많은 고민을 하셨으면 한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린다. '역사적으로, 우리끼리 힘을 모으면 그 모든 어려움도 이겨냈다'는 식의 '역사 인식의 천동설'에서는 제발 벗어나 주셨으면 한다. 국뽕만 가득한 지금의 한국사 교과서를 필자가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사 전공(서양사 부전공). 고려대 세종캠퍼스 고고학 전공(석사). 언론을 통한 사회 개혁을 꿈꾸며 1990년 조선일보사 입사. 주로 문화재 담당기자를 하며 조선일보 역대 특종 건수 10위에 듦. 2004년 서울시청 출입기자 시절, 이춘식 당시 부시장에게 "서울광장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도심에서 들어보자"고 권유. 그해 12월 24일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이 개장되자 특종 기사를 쓸 때보다 더 기뻤음. 이를 계기로 '글'이 아니라 '정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관심을 갖게 됨.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 행정관(2009년), 대한의사협회 제40대 집행부 홍보·공보이사(2018년) 역임.  

2011년 이후 현재까지 선대의 고향인 인천 검단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서와 집필 활동 중, 저서로는 한국사에 대한 지나친 미화를 비판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반역』(2004년 조선일보사 간). 신라인들이 남긴 모든 기록을 전수조사한 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삼국통일이 아니라 삼한통일을 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한 『신라인은 삼국통일을 말하지 않았다』(2017년 학고재 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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